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서 53장 5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나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쉽고 간단하다.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만 믿기만 하면 된다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결코 쉽지 않았다. 나의 더럽고 추악한 죄들에 대한 대가를 위해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셔야 했다. 생명과 바꾸어 베풀어 주신 은혜였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 였다.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싶었다. 나의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큰 지 깨닫고 싶었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더 알고 싶었다. 내가 패션을 너무나 보고 싶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영화에 대해 참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한 두 부분(멜깁슨이 카톨릭이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문제될 게 전혀 없는 영화라고 본다. ‘태극기 휘날리며’ 를 소화할 수 있는 정도라면 잔인하고 끔직한 정도도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객관적인 폭력성과 선정성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영화 자체가 있었던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꼭 보아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 만들기 전부터 소란스러웠던 반유대주의에 대한 논란은 유대인들의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한다.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사실은 바로 나였고 우리였다.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채찍질과 골고다 언덕까지의 길,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을 못박는 장면, 뿐만 아니라 로마 군인들과 자신을 따랐던 이들에게 조롱 당하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그 모든 게 내가 받아야 할 나의 죄의 짐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인 수난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 더 끔찍했다고 한다.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하나님의 모든 진노의 대상으로서 당하신 영적인 고난이 훨씬 크셨을 텐데 이것도 꼭 감안해야 할 것이다)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을 눈물과 함께 지켜 보면서 마음 속으로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이건 너무 합니다. 정말 너무 심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앞으로도 당할 수난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막막했다. 그러나 절대 눈을 가리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저것이 내가 치루어야 할 나의 죄의 대가였기 때문이고, 저것이 나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 ‘정말 나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위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나의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 그 크기와 깊이를 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팠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면서 또한 든 생각이 있는데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딨어? 이렇게 세상에는 끔찍하고 무서운 많은 고통들이 계속 되고 있는데 그걸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야.’ 정말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원망을 하곤 한다. (사실 세상에 모든 ‘악’들은 우리가 자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하게 하나님 탓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해답이 십자가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고통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포기한 채 우리의 세계에 들어오셨고, 그러실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다. 공의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 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항상 감사하고 항상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인 걸 나보다 더 잘 아시는데도, 그렇게 큰 고통을 무릅쓰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와 교제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14-
바울의 고백이 바로 내 고백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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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걸 몰랐을까? 전지전능하다면서?"
이러는데..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서..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잘한걸까? 난 솔직히 하나님이 알면서도 나두셨다고 생각하는데..
무교한테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좋은 대답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리플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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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 그런 제약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겠죠
그 분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단 다른 alternative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기를 원하셨어요.
다른 그 누구보다 당신이 내게 소중합니다. 사랑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의지로 서로의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사랑하는 것.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선택했어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봤다면
선악과의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하와의 선택을 인정하셨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선악과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어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크고 아름답고 슬프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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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야...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도록 쓰임받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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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이 게시판 금지어가 있거든. comment버튼 누르기 전엔 항상 복사해놓는 습관을^^
으 당황했겠다.('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이야 ^^a)
와. 은비가 멋찌게 답변해줬구나. 고마워~~
나도 밑에다가 살짝 덧붙여 볼께
응석아. 너 위해서 매일 기도하고 있어. (나에게 전화했을 때 넌 이미 다 됐다니깐 ㅋㅋ)
힘내자!!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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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 할 수도 있는 자유를 받았는데, 대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
선악과를 자유의지에 대한 일종의 기준으로 삼으신 거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거 자체가 악이 존재할 가능성, 죄로 인해 초래될 고난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애..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창조하신
건 맞는데 따먹은 건(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건) 인간인 거지.
하나님이 전능하신 데 그럼 왜 자유의지를 줘서 악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드셨을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죄를 짓지 않토록 프로그램화 되어 창조되었다면.. 꼭두각시처럼)
물론 죄도 없고, 고난도 없었을 테지만, 가장 높은 가치인 사랑도 없는 세상이 되었을 거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건 은비가 말 한 것처럼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때문이거든.
하나님과 우리의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에는 선택권이 필요한 거지.
(자유의지는 있는데 죄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건 모순이라고 생각해)
암튼 결국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고 죄를 범하게 된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죽음)되게 되었지만 이글(패션)에서 썼듯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흐흐 도움이 되었나 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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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나도 저번에 "장석준 간사님 a니 전도사님이다~"(a=아)쓰다가 여러번 빠꾸먹어서 맘상했었어~+_+ 복사해두는 습관 좋다.(실은 이거도 복사 안했다가 두번째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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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지혜야 니가 쓴 건 금지어가 몬지 알고도 잘 못찾을 조합이다 ㅋㅋ
ㅋㅋ 사실 예수님의 수난이 주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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