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장소이기만 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기능을 잘 살려 오랜 세월 손때가 묻도록 사용한 부엌이라면 더욱 좋다. 뽀송뽀송하게 마른 깨끗한 행주가 몇 장 걸려 있고 하얀 타월이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구역질이 날 만큼 너저분한 부엌도 끔찍이 좋아한다. 바닥에 채소 부스러기가 널려 있고, 실내와 밑창이 새카매질 만큼 더러운 그곳은, 유난스럽게 넓어야 좋다. 한 겨울쯤 무난히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냉장고가 우뚝 서 있고, 나는 그 은색 문에 기댄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 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 밖에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나와 부엌이 남는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조금 그나마 나은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기진맥진 지쳤을 때 ,나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홀로 있어 추운 곳이든, 누군가 있어 따스한 곳이든, 나는
떨지않고 똑바로 쳐다보고 싶다. 부엌이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한다.
무슨 SF같다.우주의 어둠이다.
그곳에서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긴 밤이 가고, 아침이 와주었다.
다만 볕 아래서 잠들고 싶었다.
아침햇살에 눈뜨고 싶었다.
그 외에 모든 것에는 그저 담담했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성가신 일들을 생각하며 절망하여
뒹굴뒹굴 자고 있는데,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를, 나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가 웃었다.너무도 환하게 웃어, 현관에 선 그 사람
의 눈동자가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그가 갑자기 이름을 부른 까닭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
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어,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오늘밤도 부엌 옆에서 자는 게 우스워 웃었다. 그러나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런 잠자리만 바라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외로움이 커지니까 안 된다. 하지만 부엌이 있고, 식물이 있고, 같은 지붕 아래 사람이 있고, 조용하고...... 최고다. 여긴 최고다. 나는 안심하고 잠들었다.
바람이 불고, 맹렬하게 흘러가는 구름의 파도가 보였
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 따위, 아무것도 없다.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말 못하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말하는데, 질주한 것은 내
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난 그 모든 것이 진정 슬픈걸
그 모든 것. 이제 거기에 있을 수 없어진 모든 것.
굉장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별 일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기적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안다. 즐거웠던 시간의 빛나는 결정이, 기억 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금 우리를 떠밀었다.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향기로웠던 그날의 공기가 내 마음에 되살아나 숨쉰다.
정말 좋은 추억은 언제든 살아 빛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처롭게 숨쉰다.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길이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하는 순간을 꿈꾼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알았다. 말로서 분명하게 알았다. 길은 항상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코 운명론적인 의미는 아니다. 나날의 호흡이, 눈길이,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자연히 정하는 것이다.그리하여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정신을 차리니 마치 당연한 일이듯 낯선 땅 낯선 여관의 지붕 물구덩이 속에서 한겨울에, 돈까스 덮밥과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