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즈키가 죽고 나서 고교를 졸업하기까지의 한 10개월 동안, 나는 주위의 세계 속에 나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설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여자아이와 사이가 좋아져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결국 반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어느 것 하나 바라는 게 없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 싶은 토쿄의 사립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감흥도 없이 입학했다. 그 여자아이는 내게 토쿄를 가지 말아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래로 고베의 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넌 나와 이미 자버렸으니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하고 말하며 그녀는 울었다."그런게 아냐"하고 나는 대꾸했다. 나는 그저 거리를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토쿄를 향하는 신간선 기차안에서, 나는 그녀의 좋은 부분이나 뛰어난 부분을 떠올리고, 내가 참으로 몹쓸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하고 뉘우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토쿄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가지밖엔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것-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펠트를 발라붙인 당구대나 새빨간 N360, 그 책상 위의 흰꽃 같은 것들을 모두 다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경찰의 취조실에 놓여 있던 평퍼짐한 형상의 문진(文鎭) 같은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렇게 잘 돼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무언가 뿌옇게 흐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덩어리는 뚜렷한 단순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몸 안에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정렬한 적(赤)과 백(白)의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흡사 미세한 티끌처럼 폐속에 흡입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삶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손 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은 없는 것이다」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사색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젠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다. 죽음은「나」라는 존재 속에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17세의 5월의 어느날 밤에 기즈키를 잡은 죽음은, 그때에 동시에 나를 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18세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하고 있었다. 심각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프레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背反性)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르웨이의 숲 by 하루키
나는 특별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들어갈 듯 싶은 토쿄의 사립대학을 택해 시험을 보았고, 특별한 감흥도 없이 입학했다. 그 여자아이는 내게 토쿄를 가지 말아달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래로 고베의 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넌 나와 이미 자버렸으니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지?" 하고 말하며 그녀는 울었다."그런게 아냐"하고 나는 대꾸했다. 나는 그저 거리를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토쿄를 향하는 신간선 기차안에서, 나는 그녀의 좋은 부분이나 뛰어난 부분을 떠올리고, 내가 참으로 몹쓸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하고 뉘우쳤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토쿄에 도착해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가지밖엔 없었다. 모든 사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것-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펠트를 발라붙인 당구대나 새빨간 N360, 그 책상 위의 흰꽃 같은 것들을 모두 다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경찰의 취조실에 놓여 있던 평퍼짐한 형상의 문진(文鎭) 같은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렇게 잘 돼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내 안에는 무언가 뿌옇게 흐린 공기 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덩어리는 뚜렷한 단순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말로 바꿔 놓을 수가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서 몸 안에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정렬한 적(赤)과 백(白)의 네 개의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해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것을 흡사 미세한 티끌처럼 폐속에 흡입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삶으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손 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잡히는 일은 없는 것이다」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사색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젠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죽음을(그리고 삶을) 파악할 수는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적 존재 따위가 아니다. 죽음은「나」라는 존재 속에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저 17세의 5월의 어느날 밤에 기즈키를 잡은 죽음은, 그때에 동시에 나를 잡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 덩어리를 몸 속에 느끼면서 18세의 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하고 있었다. 심각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프레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背反性)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노르웨이의 숲 by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