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공동체 (옛날이야기^^)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명기7:9-
가정은 약속이 있는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향해 많은 약속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과 같이 가정을 통해
신앙이 계승될 것을, 그리고 그 선조들의 믿음으로 인한 축복이
그 자손들에게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체험하고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다^^
나는 5대째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우리 친할머니의 할아버지(이화춘 목사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믿음을 갖게 되셔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처음 파송된
목사님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으셨다고 한다.
그 분을 시작으로 그 믿음이 너무나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거쳐 나에게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가정을 구원해주신 것으로도 너무나 감사한데,
여러 면에서 또한 풍성하게 축복해주셔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신실하심에
'역시~' 하게 된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이화춘 목사님의 스토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올해 초에 있었던 가족 모임에 갔었으면 좀 더 일찍 알 수 있었을텐데..)
국사 시간에 나올 법한 시대 상황에서 한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이
재밌는 방법으로 나타나셔서 일어나게 되는 스토리가 감동적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훨씬 더 자세한 이야기도 있는데 그냥 간단히 정리되어 있는 글도 있길래
이화춘 목사님 이야기
일제 시대 항일 민족 운동의 본거지였던 만주 북간도 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처음 들어간 것은 1907년이었다. 의식 있는 망명 기독교인들이 한인촌을 형성하고 조직적인 민족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는 기독교 민족 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선구자'란 노래로 유명한 북간도에서도 용정은 항일 민족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박무림, 정재면, 김약연, 구춘선, 서춘, 문치정, 윤동주 등 기라성 같은 민족 운동가들을 배출한 간도의 용정촌, 그 곳에 복음을 들고 처음으로 찾아간 인물이 이화춘 목사이다.
이화춘은 1871년에 태어나 일곱 살 때에 부모형제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나루터에서 뱃꾼으로 일하던 덕보라는 나쁜 사람이 부모형제를 물에 빠져 죽게 한 후에 재산을 탈취해 갔기 때문이다. 어린 이화춘은 부모형제를 잃고 재산을 빼앗긴 채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나 할머니 마저 열 두 살 때에 돌아가셨다. 이 때 이화춘 목사는 외가댁에 살면서 가게의 점원으로 들어가 5년간 일을 배운 후에 열 여덟의 나이로 패물점을 차려 자립하였다. 그러나 보부상으로서의 그의 삶은 고생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가문을 멸망시킨 원수 덕보에게 복수하려다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풀려났고, 보부상이 되어 중앙 정치에도 관여했으나 그것도 실패했고, 금광에 손을 댔다가 전염병으로 망하는 등 비운의 연속이었다. 스물 일곱에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되찾긴 했으나 스물 아홉 되던 1899년에 얻은 아들이 몸이 실하지 못하여 첫 돌이 되어도 그냥 갓난 아이 티를 벗지 못하고 늘 칭얼대며 보챘다. 걱정이 되어 동네 무당에게 물어보니 악귀가 들려서 그렇다며 돈 천냥을 들여 굿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난한 살림에 돈 천냥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화춘은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화풀이할 곳만 찾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전부터 알고 지내던 개성 상인 방씨를 찾아 개성 장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방씨는 집에 있었는데 마당에 들어서면서 보니 방씨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이화춘이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해도 모른 체 하고 한참 동안 중얼거리고 있다가 얼마 후에야 그는 이화춘을 맞으며 "노여워하지는 않았소?" 하며 손을 잡으면서 영접하였다. 이화춘도 마루 위로 오르면서 물었다. "자네 무엇을 믿는가?" 방씨가 하는 말이 "응, 요즈음 천주학을 배우고 그 도리가 훌륭하여 믿게 되었네." 하며 방씨는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방씨가 천주교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개성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천주교인이 있어 1866년 병인 교난 때 6명의 개성 교인이 순교 당하였다. 따라서 천주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성에 널리 알려져 있는 터에 친구 방씨가 천주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 천주학에 관한 것이었다. "천주학을 하면 죽어서도 눈을 빼간다."고 알고 있던 이화춘에게 방씨는 천주학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을 조목조목 들어 풀이해 주었다. 천주를 믿으면 인간이 복을 받고 또한 모든 악귀가 무서워 달아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악귀가 달아난다는 말에 귀가 번쩍 트였다. 천주교 교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악귀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것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이다. 이화춘은 천주학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방씨에게서 {인가귀도}란 책을 빌려 왔는데 그 책은 1894년에 감리교 출판사에서 낸 조그만 전도 책자로 내용은 타락했던 가장이 회개하고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 후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붙은 악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말에 부인도 믿기로 동의하였다. 마침 방씨를 만난 그 다음 주일은 고랑포에 천주교 공소가 완성되어 십자가를 꽂는 날이었다. 부부는 그날 미사에 참석하였다. 사흘 후옌가 집에서 기르던 돼지 새끼 다섯 마리와 검정개가 이유 없이 거품을 토하고 죽는 일이 일어난 후 아이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 이들 부부에겐 너무도 분명한 기적이었다.
이화춘은 좀더 신앙을 철저히 하고 싶은 생각에서 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북부 거리에 조그만 상점을 냈다. 당시 개성에는 병인 교난 때 순교한 교인의 집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 '은행나무집'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이 성당은 본래 서울의 약현 본당 관할 공소로 있다가 1901년 본당으로 독립되면서 프랑스인 루블레 신부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시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성으로 옮긴 후 오히려 이화춘은 신앙의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개성 성당 신부의 음주 때문에 시작되었다. 천주교 경문인 {12단}을 사려 갔다가 저녁 식사중인 신부가 소주를 많이 마시는 것을 보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당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신앙의 결단으로 금주를 결심한 그로서는 술 마시는 신부를 보고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찾아간 곳이 개신교 예배당이었다. 개성에 있는 남감리회 예배당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인삼재배용으로 쓰이던 움막을 개조한 교회였다. 이화춘은 여기서 세례를 받고 곧이어 성서를 파는 매서인이 되어 전에 장사 다녔던 지방을 전도하며 다니게 되었다. 이후 이화춘은 권사 직분을 받아 전도사로 일하다가 협성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에 개신교 최초의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부모 잃은 고아요, 천한 보부상에 지나지 않았던 이화춘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목사가 되어 한국 기독교회사에 족적을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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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이는 가정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 만큼 가정은 우리 신앙에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친다.
정말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로 인해 받은 축복에 감사하며,
나로 인해 나의 자녀들과 그 후대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기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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